오늘은 피천득 시인의 시 모음을 포스팅합니다.
새해 / 피천득 시인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저녁때 / 피천득 시인
긴 치맛자락을 끌고
해가 산을 넘어갈 때
바람은 쉬고
호수는 잠들고
나무들 나란히 서서
가는 해를 전송할 때
이런 때가 저녁이랍니다
이런 때가 저녁이랍니다
눈물 / 피천득 시인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연가 / 피천득 시인
훗날 잊혀지면
생각하지 아니하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잊으리도 아니하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잘 사노라 하리라
훗날 잊혀지면
잊은 대로 살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살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웃으며 지나치리라
너는 이제 / 피천득 시인
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
너는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안정을 얻기 위하여 견디어 온 모든 타협을
고요히 누워서 네가 지금 가는 곳에는
너같이 순한 사람들과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
가을 / 피천득 시인
호수가 파랄 때는
아주 파랗다
어이 저리도
저리도 파랄 수가
하늘이, 저 하늘이
가을이어라.
고백 / 피천득 시인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 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기억만이 / 피천득 시인
아침 이슬 같은
무지개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비바람 같은
파도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구름 비치는
호수 같은
그런 순간도 있었느니
기억만이
아련한 기억만이
내리는 눈 같은
안개 같은
너 / 피천득 시인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너는 아니다 / 피천득 시인
너같이 영민하고
너같이 순수하고
너보다 가여운
너보다 좀 가여운
그런 여인이 있어
어덴가에 있어
네가 나를 만나게 되듯이
그를 내가 만난다 해도
그 여인은
너는 아니다
노 젓는 소리 / 피천득 시인
달밤에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
만나러 가는 배인가
만나고 오는 배인가
느린 노 젓는 소리
만나고 오는 배겠지
연정 / 피천득 시인
따스한 차 한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잊으시구려 / 피천득 시인
잊으시구려
꽃이 잊혀지는 것 같이
한때 금빛으로 노래하던
불길이 잊혀지듯이
영원히 영원히 잊으시구려
시간은 친절한 친구
그는 우리를 늙게 합니다.
누가 묻거든 잊었다고
예전에 예전에 잊었다고
꽃과 같이 불과 같이
오랜 전에 잊혀진
눈 위의 고요한 발자국 같이
창밖은 오월인데 / 피천득 시인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
라일락 향기 짙어 가는데
너는 아직 모르나 보다
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
크리스탈 같은 미(美)라 하지만
정열보다 높은 기쁨이라 하지만
수학은 아무래도 수녀원장
가시에도 장미 피어나는데
'컴퓨터'는 미소가 없다
마리도 너도 고행의 딸
오월 / 피천득 시인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 가락쥐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을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은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피천득 시인 (1910~2007)
시인이자 수필가인 피천득 시인은 호가 금아(琴兒)이며, 중국 상하이 호강대학교에서 영문학울 전공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교수(1946~1975)로 재직하였다.
등단은 1930년 <신동아>에서 "서정별곡", "파이프" 등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는 "서정시집", "금아시문선" 등이 있고, 수필로는 "인연", "은전 한 닢"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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