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노을에 관한 주옥같은 시 모음을 포스팅 합니다.
노을 / 조병화 시인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 / 용혜원 시인
젊은 날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아침에 동녘
하늘을 불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도
소리치고 싶도록 멋이 있지만
저녁의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 지는 태양의 빛깔도
가슴에 품고만 싶습니다
인생의 황혼도 더 붉게
붉게 타올라야 합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까지
오랜 세월 하나가 되어
황혼까지 동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노을 / 윤보영 시인
나는 아직
내 가슴을 태우던
노을을 기억합니다
그대 마음에서 옮겨붙어
타들어 가던
노을 앞에서 / 신경림 시인
노파가 술을 거르고 있다
굵은 삼베옷에 노을이 묻어 있다
나뭇잎 깔린 마당에 어른대는 긴 그림자
기침 소리, 밭은기침 소리들
두런두런 자욱한 설레임
모두들 어데로 가려는 걸까
노을 / 나태주 시인
저녁 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나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 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노을 / 나태주 시인
방안 가득
노래로 채우고
세상 가득
향기로 채우고
내가 찾아 갔을 때는
이미 떠나버린 사랑아
그 이름 조차 거두어간 사람아
서쪽 하늘가에
핏빛으로 뒷 모습만
은은하게 보여줄 줄이야
노을 / 서정윤 시인
누군가 삶을 마감하는가 보다
하늘에는 붉은 꽃이 가득하다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을 불태우는 목숨
흰 날개의 천사가
손잡고 올라가는 영혼이 있나 보다
유난히 찬란한 노을이다
낙조(落照) / 평보 시인
바다 너머
무엇이 있는가?
안식을 찾아가는 해
하늘을 불살라
누구에게 보이려는가?
노을빛에 기대어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윤슬의 빛이
소멸될까 조바심한다
지친 나그네
놀랜 가슴 가다듬고
한 세상 머무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그대 젊음을 노래
하려든
지는 해 서러워 말라
노을 / 김용택 시인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눈부시게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지는 해 아래로 걸어가는
출렁이는 당신의 어깨에 지워진
사랑의 무게가
내 어깨에 어둠으로 얹혀옵니다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사랑은,
사랑은
때로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는 것이더이다
저녁노을 / 도종환 시인
당신도 저물고 있습니까
산마루에 허리를 기대고 있어
저녁에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뿜어져나오는 해와 입김이 선홍빛 노을로
번져가는 광활한 하늘을 봅니다
당신도 물들고 있습니까
저를 물들이고 고생대의 단층 같은 구름의 물결을 물들이고
가을산을 물들이고 느티나무 잎을 물들이는 게
저무는 해의 손길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구름의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처럼
나는 내 시가 당신의 얼굴 한쪽을 물들이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내 노래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당신을 물들이고 사라지는 저녁 노을이기를
내 눈빛이 한 번만 더 당신의 마음을 흔드는
저녁 종소리이길 소망했습니다
시가 끝나면 곧 어둠이 밀려오고
그러면 그 시는 내 최후의 시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내 시집은 그때마다 당신을 향한
최후의 시집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떨었습니다
최후로 생각하는 동안 해는 서산을 넘어가고
한 세기는 저물고 세상을 다 태울 것 같던 열정도 재가 되고
구름 그림자만 저무는 육신을 전송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저물고 있습니다
스러져가는 몸이 빚어내는 선연한 열망
동살보다 더 찬란한 빛을 뿌리며
최후의 우리도 그렇게 저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무는 시간이 마지막까지 빛나는 시간이기를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하늘 위에
마지막 순간까지 맨몸으로 찬연하기를
노을 / 전은영 시인
바이올린을 켜십시오
나의 창가에서
타오르던 오늘
상기된 볼
붉은빛 속에
가만히 감추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해 주십시오
저녁 노을 / 이해인 수녀
있잖니 꼭 그맘때
산 위에 오르면
있잖니 꼭 그맘때
바닷가에 나가면
활활 타는 저녁 노을
그 노을을 어떻게
그대로 그릴 수가 있겠니
한 번이라도 만져 보고 싶은
한 번이라도 업어 보고 싶은
주홍의 치마폭 물결을
어떻게 그릴 수가 있겠니
혼자 보기 아까워
언니를 부르러 간 사이
몰래 숨어 버리고만 그 노을을
어떻게 잡을 수가 있겠니
그러나 나는 나에게도 노을을 주고
너에게도 노을을 준다
우리의 꿈은 노을처럼 곱게
타올라야 하지 않겠니
때가 되면 조용히
숨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시인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노을 / 기형도 시인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의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석양 / 허형만 시인
바닷가 횟집 유리창 너머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로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외치면 부딪치는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볼그족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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