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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 이정하 시인의 시 모음 (간격/ 들꽃/ 꽃잎의 사랑/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 사랑의 묘약/ 그대에게 가자/ 한 사람을 사랑했네/

by meta-verse 2025.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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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정하 시인의 주옥같은 시 모으을 포스팅 합니다.


간격 / 이정하 시인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엄청난 것도 아니면서
늘 그것은 일정하게 뻗어 있어
나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서로 다른 샘에서 솟아 나온 물도
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남을.
 
그대와 나,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나중에 한 몸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입니다.


들꽃 / 이정하 시인
 
우리 
바람 부는 들판 그 어디쯤인가에서
한 송이 들꽃으로 만나자
 
구름이 흘러가는 곳
아득히 먼 그곳에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손짓하며 다가서는 
물빛 그리움으로 만나자
 
삶의 굽이굽이마다
시린 가슴 싸안고
지친 영혼 살포시 보듬어
하늘의 별빛으로 불 밝혀주는 그대
 
우리
후미진 계곡에서
쓸쓸히 피어나
맑은 시냇물에 얼굴을 씻고
구름이 손짓하면
말없이 미소 짓는 
한 송이 들꽃으로 만나자
 
들꽃처럼 그렇게 쓰러져 가자. 


 
꽃잎의 사랑 / 이정하 시인
 
내가 왜 몰랐던가
당신이 다가와 터뜨려 주기 전까지는 
꽃잎 하나도 열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이 가져가기 전까지는
내게 있던 건 사랑이 아니니
내 안에 있어서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니
아아 왜 몰랐던가
당신이 와서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것
 
주지 못해 고통스러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 / 이정하 시인
 
행복은 근사한 말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속 깊은데
숨어있는 진실이며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집니다
 
행복은 또 스스로 만족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의 묘약 / 이정하 시인
 
하루 종일 어지럼증에 시달렸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어지럼 증세는 
그대를 만난 후 생겨난 것입니다. 
 
이 고약한 어지럼증으로 인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틀거립니다. 
식욕이 없는 건 둘째 치고라도
온몸에 힘이 빠져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습니다.
이런 나를 보고 주위에선 글쎄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먹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난 쓴웃음 짓지요.
그대의 사랑 외에는 어디 따로 약이 있나요, 
그대를 보기만 해도 깡그리 치유되는 것을.


 
그대에게 가자 / 이정하 시인
 
가자, 밤 열차라도 타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수년간 떠돌던 바람, 
여지껏 내 삶을 흔들던 바람보다도 더 빨리 
어둠보다도 더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가자, 밤열차라도 타고, 
차창가에 어리는 외로움이나 쓸쓸함, 
다 스치고 난 후에야
그것들도 내 삶의 한 부분이었구나, 
솔직히 인정하며, 
 
가자, 밤열차라도 타고, 
올 때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아 나서자.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두 팔 걷어 부치고 대문을 나서자. 
 
막차가 떠났으면 걸어서라도 가자.
늘 내 가슴속 깊은 곳
연분홍 불빛으로 피어나는 그대에게.
가서, 기다림은 이제 더 이상
내 사랑의 방법이 아님을 자신 있게 말하자. 
내 방황의 끝, 그대에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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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이정하 시인
 
내 영혼의 숲에 
비가 내린다
 
담장마다
개나리 넝쿨 흐드러지고
목마른 꽃잎들은 땅에 떨어져
그리움으로 물든 가슴까지 적시고
 
먼 하늘을 우러르면
내 혈관의 수맥을 따라
온몸으로 번져 오는 
이 짜릿한 봄의 향취
 
아름다워라.
푸른 풀잎들
밤새워 비를 맞고
뿌리 끝까지 더욱 싱그러워져서
잎새마다 하나씩 파아란 꿈을 달고
새롭게 열리는 세상 속으로
일제히
달려가고 있다


 
한 사람을 사랑했네 1 / 이정하 시인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도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어떤 날 / 이정하 시인
 
늘 듣던 말인데도
유독 서운할 때가 있다
 
늘 보던 사람인데도
그 앞에 가지 못하고
발걸음 멈칫할 때가 있다
 
망설이다 돌아서면
가슴 깊은 곳에서
쓸쓸한 바람만 일게 하던
 
어떤 한 사람 때문에, 
그의 눈빛, 나지막한 말소리, 옆모습 때문에
 
눈앞이 온통 뿌옇게 흐려오던 
그런 어떤 날


 
그대가 지독히도 그리운 날 / 이정하 시인
 
비가 내립니다. 
그동안 무던히도 기다렸던 비가
소리도 없이 
내 마음의 뜨락에 피어 있는 
목련꽃들을 적시고 있습니다.
 
이런 날엔
지독히도 그리운 사람이 있지요. 
목련꽃처럼
밝게 웃던 그 사람. 
 
가까운 곳에 있더라도
늘 아주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
 
그 사람도 지금쯤
내리는 저 비를 보고 있을런지. 
내가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 또한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런지.
 
설마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내리는 비는 
내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파고듭니다.


 
기다리는 이유 / 이정하 시인
 
만남을 전제로 했을 때
기다림은 기다림이다.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았을 때
기다림은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엔,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는, 
그리하여 밤마다 심장의 피로 불을 켜
어둔 길을 밝혀두는 사람이 있다.
 
사랑으로 인해
가슴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오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바깥에 나가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왜 안되는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그 순간만으로 그는
아아 살아있구나 절감한다는 것을.
쓰라림뿐일지라도 오직 그 순간만이
가장 삶다운 삶일 수 있다는 것을


 
아직도 기다림이 있다면 행복하다 / 이정하 시인
 
사랑이 가슴에 넘칠 때
진실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의 감정을 가슴 가득 담고
살아갈 때 누구라도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늘 되풀이되는 일과 속에서
정신없이 맴돌다가도 가끔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난
이런 소망을 가만히 뇌어 봅니다
언제나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라고...
 
나의 이 바람은 큰 사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지를 
뻗치는 게 사랑이라고 
감히 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이란 것은
관심을 갖지 않으며 절로
솟아나지 않는 정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솟아나는 정이 아닌 것이지요
 
퍼낼수록 다시금 맑고도 그득하게
고여 오는 샘물
당신도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샘물을 자주 
그리고 되도록 
많이 펴내지 않으시렵니까


 

비 오는 날의 일기 / 이정하 시인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
난 창문을 열고 하루종일 밖을 내다보았다.
비 오는 이런 날이면 내 마음은
어느 후미진 다방의 후미진 낡은 구석 의자를 닮네.
비로소 그대를 떠나 나를 사랑할 수 있네.
안녕, 그대여.
난 지금 그대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 
당신을 만난 날이 비 오는 날이었고
당신과 헤어진 날도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이었으니
안녕, 그대여.
비오는 이런 날이면 그 축축한 냄새로 내 기억은 
한없이 흐려진다. 
그럴수록 난 그대가 그리웁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안녕, 그대여. 
비만 오면 왠지 그대가 꼭 나를 불러줄 것 같다.


 
먼 하늘 / 이정하 시인
 
끝내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 두었네.
말이란, 은밀히 배반의 씨앗을 
키울 수도 있다기에.
그대 앞에서
사랑이란 말은 또한 
얼마나 허세인가. 
내 가슴 떨림에 비한다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난 그저 웃고 말 뿐, 
먼 하늘을 쳐다보는 것으로
그 말을 대신하고자 했네.
그러나 어인 일인가, 
돌아오는 길이 이리도 허전함은.
사랑한다는 말은 끝내 접어 두고서.


 
당신을 보내고 난 후에야 / 이정하 시인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당신을 보내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난 자리에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낙엽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해는 떠 오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가까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며칠 못 보아도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를 떠나간 당신을 나는 끝내 떠날 수 없었음을. 
내 안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 이제는 나 조차도 꺼내기 힘든 당신, 
아아 하필이면 나는 당신을 보내고 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단 하루도 당신 없이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 이정하 시인
 
나는 내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대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간직하기 위해서.
 
또 더 이상 아파해야 할 것이 없어질 때까지
그대와 함께한 추억을 샅샅이 끄집어내어
상처받을 것입니다
사랑을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픔에 무감각해지기 위해서. 


 
창가에서 / 이정하 시인
 
비 갠 오후
햇살이 참 맑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세상이 왜 그처럼 낯설게만 보이는지
 
그대는 어째서 
그토록 순식간에 왔다 갑니까.


멀리서만 / 이정하 시인
 
찾아 나서지 않기로 했다.
가기로 하면 가지 못할 일도 아니나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움 안고 지내기로 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대가 많이 변했다니
세월 따라 변하는 건 탓할 건 못되지만
 
예전의 그대가 아닌 그 낭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멀리서 멀리서만 그대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 이정하 시인
 
내 슬픈 사랑아
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내 가진 것은 빈손뿐
더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된다 하더라로
결코 그대 하나 가진 것만 못한데
 
내 슬픈 사랑아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더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해지는 
이 그리움밖에는 ...


 

가을 / 이정하 시인
 
가을을, 
그냥 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물들이면 옵니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모두가 닮아갑니다.
 
내 삶을 물들이던 당신,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벌써부터 나, 
당신에게 이렇게 물들어 있는데, 
당신과 이렇게 닮아 있는데.


뒤늦게서야 / 이정하 시인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떠나고 난 뒤에야 난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같은 꿈을 되풀이해서 꿀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되풀이해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대가 멀리 떠난 뒤였습니다
 
나는 왜 항상 늦게 느끼는지요.
언제나, 지난 뒤에 후회해 보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대가 먼저 길을 떠났고, 
뒤늦게 내가 부지런히 따라가 보았지만
이미 그대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이정하 시인 (1962~ )
 
우리나라 대표적인 감성시인인 이정하 시인은 1962년 대구광역시에서 출생하여 원광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며, 198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수상하였으며, 198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서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한사람을 사랑했네", "다시 사랑이 온다"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우리 사는 동안에",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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