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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시인 해설 및 해석

by meta-verse 202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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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해설 포스팅합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시인
 
왜 나는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 놓여있다
이를 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문학춘추> 1965.12.


 
※ 시인 김수영(1921.11.27.~1968.6.16.) 은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관심을 가진 참여주의 시인으로 "사령", "그 방법을 생각하며",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의 시가 있다. 그중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1965년에 발표한 시로, 당시 자유·민주·정의·혁명 등의 4·19 정신이 멀어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분노와 절망 속에서 쓴 시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시인 해설
 
왜 나는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분노하는 속물적인 근성 및 옹졸함에 대한 고백과 함께 정당성이 결여된 권력자들의 추악한 모습에 대해서는 방관하고 있는 화자의 이중적인 허위의식과 자기 고백을 하고 있다.)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언론과 정치적 자유 등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일에 마땅히 분개하여야 함에도 적극 나서지 않고 침묵하면서, 주변의 사소한 일에는 분노하는 자신의 소시민적 삶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다.)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 놓여있다
이를 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나의 옹졸한 소시민적 모습은 오랜 기간에 걸쳐 체질화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 설명하면서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사소한 일에만 신경 쓰며 살아가고 있는 화자는 사소한 일조차도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무기력하고 보잘것 없이 패배감에 젖어 사는 모습에 대한 성찰)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사회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냉정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강한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하고 사회적 약자에게만 반항하는 옹졸한 모습에 대한 자기반성을 나타내고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 바람처럼 먼지처럼 왜소하고 볼품없는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독백으로 스스로 자책을 하면서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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