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단풍에 관한 시 모음을 포스팅합니다.
단풍 / 정연복 시인
하루의 태양이
연분홍 노을로 지듯
나뭇잎의 한 생은
빛 고운 단풍으로 마감된다.
한 번 지상에 오면
또 한 번은 돌아가야 하는
어김없는 생의 법칙에
고분고분 순종하며
나뭇잎은 생을 접으면서
눈물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의(壽衣)
단풍잎을 입고서
한줄기 휙 부는 바람에
가벼이 날리는
저 눈부신 종말
저 순한 끝맺음이여!
땅에 떨어져서 뒹굴면
낙엽 되느니

단풍나무 아래서 / 이해인 수녀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의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단풍드는 날 / 도종환 시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 / 나태주 시인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 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
멀어지는 소리들의 뒤통수
내 마음도 많이, 성글어졌다
빛이여 들어와
조금만 놀다 가시라
바람이여 잠시 살랑살랑
머물다 가시라.

단풍 / 장용순 시인
아름다운 삶이란
이런 것일까
푸르던 모든 것
내려놓고
각기 자기 색대로
산 위에도 공원에도
아름답게 꾸미고
떠나가는 일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에도
이별의 아쉬움 있을 테지만
때가 되면
버리고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워라.

가을 단풍 / 용혜원 시인
붉게 붉게 선홍색 핏빛으로 물든
단풍을 보고 있으며
내 몸의 피가
더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 잎사귀가 어떻게
이토록 붉게 물들 수가 있을까
여름날 찬란한 태양빛 아래
마음껏 젊음을 노래하던 잎사귀들이
이 가을에
이토록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을 다 못 이룬 영혼의 색깔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며
한순간이라도
이토록 붉게 붉게 타오를 수 있다면
후회 없는 사랑일 것이다
떨어지기 직전에 더 붉게 물드는
가을 단풍이
나에게도 사랑에 뛰어들라고
내 마음을 마구 흔들며
유혹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단풍 / 박인걸 시인
꽃이 피었다
새빨간 꽃이 피었다.
높은 산비탈 단풍나무마다
황홀한 꽃이 피었다.
불이 붙었다
밝은 빨강불이 붙었다.
연기 없이 타는 불길이
골짜기마다 힘차게 타오른다.
가슴마다 깊이 맺힌
붉은 사연이 아니다.
구겨진 슬픔의
뼈아픈 눈물방울이 아니다.
살며 사랑하며
따스하게 살아온 행복을
붉은 색깔에 담아
감사의 엽서를 쓰고 있는 거다.
한 잎 두 잎
편지가 흩날리고 있다.
고마움을 담은 메시지가
멀리까지 배달되고 있다.

단풍 / 이남일 시인
우리 너무
얼굴 붉히지 말자.
짧은 가을볕에
잘난 척
얼굴 디밀지도 말자.
바람 한 줌이면
흔적 없이 날려버릴
그 자리도 연연하지 말자.
푸른 날의
그 위대한 소명을 위해
우리 홀연히 떠나자.

단풍 / 이정하 시인
바람이 내게 일렀다
이제 그만 붉어지라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 없다고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내 몸을 불태우겠다고
사랑아, 네가 미워서 떠나는 것이 아님을 믿어다오
떠나는 그 순간, 가장 불타오르는 내 몸을 보아라
줄 것 다 주고 가장 가벼운 몸으로
나무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이 아름다운 추락을

가을, 단풍을 시집보낸다 / 오광수 시인
혼사 날 앞두고 그놈의 날씨 때문에
제대로 갖춰 보내질 못하는구나.
여름볕에 그을은 손등이
아직도 검은빛이 도는데......
보내온 혼서(婚書)로 보아선
시 가문(媤家門)은 사가(士家)인 듯 싶다만,
혼서(婚書)는 잘 간직하여라.
일부종사(一夫從事)했음을
죽어서도 가져가느니
바알갛게 수줍은 너의 볼이 어여쁘구나.
이젠 신랑 오면 떠나야 될 몸
그동안 정든 곳, 휘 둘러보렴
남겨진 부모 걱정일랑 말고
두고가는 동기(同氣)가 눈이 밟힐텐데.....
시집살이 모진 것이야 참아야 하고
다 너 하기 달린 것 아니냐?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하얗게 눈 오는 날 달래 주려니
노란 저고리, 빨간 치마 펼쳐놓고
제대로 갖춰 보내야 할 텐데......

단풍이 물드는 이유 / 한승수 시인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높아진 하늘만큼
잠자리의 날개짓이 힘겹다
붉게 타오르며
하루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을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은
소멸의 순간 빛을 발하는가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남은 날들을 채워 가야 한다
잎을 떨구기 전
단풍이 곱게 물드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단풍 숲속을 가며 / 오세영 시인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옆을 보면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뒤를 보면
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
가을 산 어스름 숲속을 간다
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
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루해는
설키만 하다
찬 서리 내려
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
화려하게 천자만홍 터뜨리는데
무어라 말씀하셨나
어느덧 하얗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
철딱서니

단풍, 혹은 가슴앓이 / 이민우 시인
가슴앓이를 하는 게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대낮부터
낮 술에 취할 리가 없지
삭이지 못한
가슴속 붉은 반점
석양으로 타오르다 마침내
마침내 노을이 되었구나
활활 타올라라
마지막 한 잎까지
아쉬워 아쉬워 고개 떨구기엔
가을의 눈빛이 너무 뜨겁다

단풍나무 / 김현주 시인
단풍나무, 붉게 물들고 있었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날들 이어지더니
가을이 오고 말았지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나는
산에 올라 못되게도
단풍나무에게 다 뱉어 내
버렸지요, 내 부끄러운 마음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아, 단풍나무,
고만, 온몸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데요
내 낯빛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해질수록
가을 산마다, 단풍나무
붉게붉게 물들고 있었지요

단풍 / 정건우 시인
한 줄기에 살았었다고
똑같이 물드는 건 아닌가 보다
이파리 하나마다
바람 한 뼘 햇살 한 줌
이슬 몇 방울
나무가 온통 절박하구나
저마다의 세상을
울긋불긋 매달은 사연들
층층으로 뻗어 나간
가지 끝에서
서로 다른 애절함으로 속을 끓이다
끝내 혼절해 버린
저 생각있는 빛깔들

단풍 너를 보니 / 법정스님
늙기가 얼마나 싫었으면
가슴을 태우다 태우다
이렇게도 붉게 멍이 들었는가
한창 푸르를 때는
늘 시퍼를 줄 알았는데
가을바람 소슬하니
하는 수 없이 너도
옷을 갈아 입는구나
붉은 옷 속 가슴에는
아직 푸른마음이
미련으로 머물고 있겠지
나도 너처럼
늘 청춘일 줄 알았는데
나도 몰래 나를 데려간
세월이 야속하다 여겨지네
세월따라 가다보니
육신은 사위어 갔어도
아직도 내 가슴은
이팔청춘 붉은 단심인데
몸과 마음이 따로노니
주책이라 할지도 몰라
그래도
너나 나나 잘 익은 지금이
제일 멋지지 아니한가
이왕 울긋불긋
색동옷을 갈아입었으니
온 산을 무대삼아
실컷 춤이라도 추려무나
신나게 추다보면
흰바위 푸른솔도
손뼉 치며 끼어 들겠지
기왕에 벌린 춤
미련 없이 너를 불사르고
온 천지를 붉게 활활
불 태워라
삭풍이 부는
겨울이 오기 전에....

단풍과 나 / 정연복 시인
차츰차츰 곱게
단풍 물드는 잎들을
멀뚱멀뚱
쳐다보지만 말자.
저 많은 잎들은 빠짐없이
생의 절정으로 가는데
나는 이게 뭐냐고
기죽고 슬퍼하지 말자.
한 하늘 하나의 태양 아래
또 같은 비바람 찬이슬 맞으며
지금껏 하루하루 살아온
나무와 나의 삶인 것을.
이제 고운 빛 띠어 가는
나무의 한 생이라면
내 가슴 내 영혼 또한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어 가리.

단풍 / 피천득 시인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핏빛 저 산을 보고 살으렸더니
석양에 불 붙는 나뭇잎같이 살으렸더니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바람에 불려서 떨어지오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지오

단풍 / 김종길 시인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작년 이맘때 오른
산마루 옛 성터 바위 모서리
작년처럼 가을 들판은 저물어 간다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작년에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던 물음
자꾸만 세상은
저무는 가을 들판으로 떠오르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동안
덧없이 세월만 흘러가고
어이없이 나이만 먹어가건만
아직도 사위어가는 불씨 같은 성화는 남아
까닭없이 치미는 울화같은 것
아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저무는 산마루 바위 모서리
또 한 해 불 붙는 단풍을 본다

단풍 / 장용순 시인
아름다운 삶이란
이런 것일까
푸르던 모든 것
내려놓고
각기 자기 색대로
산 위에도 공원에도
아름답게 꾸미고
떠나가는 일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에도
이별의 아쉬움 있을 테지만
때가 되면
버리고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워라

단풍나무 / 홍경애 시인
가슴으로
토해 낸 수채화는
메어지는
이념을 불태워
아름답게 승화되고
서시처럼
잠잠한 마을
끝도 없는
원색 행렬은
찬란한 광야에
미래를 펼쳐나간다.

단풍잎 / 한상숙 시인
왜 그리 네 얼굴이 붉은 줄 몰랐다
네 가슴이 말라 가는 줄 몰랐었다.
그리고, 홀로 아프게 가슴앓이하다가
삶의 끈을 떨구어야 했는지 몰랐다
그랬었구나.
그동안 너와 함께 스쳐 간 인연들을
못 잊어 하나씩 되돌아보다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구나
그랬었구나
운명의 시간이 인연을 갈라놓을 생각을 했었구나
햇살, 바람, 풀벌레, 아침 이슬과의 만남이
매일 함께했었는데,
이별의 생각으로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말랐었구나
그랬었구나
이다지도 인연을 소중히 했었는데
햇살 여전히 빛나고, 아무 일 없던 듯이
바람은 산너머 가고, 풀벌레 때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아침 이슬은 아침에만 왔다가 사라지니
그 배신감에 땅 위로 떨어지는 것이구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렴
그들도 속으론 무척 슬퍼했을 거야.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배려에
슬퍼하지 못했고 울지 못했던 것뿐이야.

'4. 취미생활 잔치마당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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