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절기상 소설이라
겨울에 관한 시 몇 편을 포스팅합니다.
겨울사랑 / 박노해 시인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위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온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입동 / 윤보영 시인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이다
무를 뽑고
배추도 뽑고
김장을 담그는......
내 사랑도 시작이다
가을에 담아둔
따뜻한 생각으로
지금부터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그리움으로 시작이다
첫겨울 / 오장환 시인
감나무 상가지
하나 남은 연시를
까마귀가 찍어 가더니
오늘은 된서리가 나렸네
후리딱딱 훠이
무서리라 나렸네
겨울 / 조서연 시인
하얀 겨울이 왔네
자꾸만 무언가
기다려지는 계절
어떤 따뜻한
그리움이
찾아올 것만 같은 설레임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
꼭 올 것만 같은 두근거림
가슴을 담아둔
그리움으로 약속하고
쓸쓸함을 기다리며
눈이 내리는 날
마침내
추억을 만나게 되는 계절
겨울날 / 신경림 시인
우리들
깨끗해지라고
함박눈 하얗게
내려 쌓이고
우리들
튼튼해지라고
겨울바람
밤새껏
창문을 흔들더니
새벽하늘에
초록별
다닥다닥 붙었다
우리들
가슴에 아름다운 꿈
지니라고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시인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시인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은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다시 겨울 아침에 / 이해인 수녀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 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 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깃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겨울편지 / 이해인 수녀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
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이 되어 눈 오는 날
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네 마음이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본다
겨울 산길에서 / 이해인 수녀
추억의 껍질 흩어진 겨울 산길에
촘촘히 들어앉은 은빛 바람이
피리 불고 있었네
새소리 묻은 솔잎 향기 사이로
수없이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네
시린 두 손으로 햇볕을 끌어내려
새 봄의 속옷을 짜는
겨울의 지혜
찢어진 나목의 가슴 한켠을
살짝 엿보다
무심코 잃어버린
오래 전의 나를 찾았네
겨울나기 / 도종환 시인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
고갯마루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런데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겨울나무 / 도종환 시인
잎새 다 떨구고 양상 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고 말하는가
열매를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 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겨울 사랑 / 문정희 시인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겨울의 일상 / 박목월 시인
가는 눈발이 무시로 내리는 지방
사람들은 가난했다
빈 주머니를 덜렁거리며
생활 주변을 맴도는 그들의
허전한 발자국
마른풀 한 줌의 일상
밤이면
얼음조각에 부서지는 별빛을 밟고
삐걱거리는 겨울 물지게
다만
마을 어구에
고목 한 그루
언 땅에 뿌리를 펴고
그 참음의 상징
그 의지의 화신
사람들은 가난했다
모가 날카롭게 빛나는 눈발이 무시로
내리는 땅 위에서
가난한 탓으로 처절하게 아름다운
그들의 겨울
그들의 신앙
하얀 겨울에 쓴 편지 / 매화 문희숙 시인
섬진강 건너 외딴집 굴뚝엔
돌이 엄마 아침밥 하시는지
파란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고
강기슭 따라 산기슭 바위에
물새가 앉아 있는 나룻배에도
하얀 동화 나라같이 아름답다
서울로 떠난 그 사람 생각에
숙이 가슴이 콩콩 뛰는 것은
함박눈 내리면 온다고 했는데
긴긴밤에 그리움 가득히 담아
꿈길로 편지 쓰는 하얀 겨울
창가엔 함박눈 조용히 쌓인다.
겨울 초대장 / 신달자 시인
당신을 초대한다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망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고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이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 같은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잎처럼
춤추며 내린다네
내 뜰 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
온 우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 위에...
뜨거운 차를 분배하고
당신이 누른 초인종 소리에
나는 답한다
어서 오세요
이 겨울의 잔치상에...
겨울 / 조병화 시인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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