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 한강 시인의 시 모음(어느 늦은 저녁 나는/ 새벽에 들은 노래/ 심장이라는 사물/ 파란 돌/ 어두워지기 전에/ 피 흐르는 눈 등)
오늘은 한강 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몇 편 포스팅합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시인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새벽에 들은 노래 / 한강 시인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은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새벽에 들은 노래 2 / 한강 시인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내 마음
누더기,
너덜너덜 넝마 되었을 때도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
그 푸른 입술 열어
심장이라는 사물 / 한강 시인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ㄱ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파란 돌 / 한강 시인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조용한 날들 / 한강 시인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 한강 시인
어두워지기 전에
그 말을 들었다.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지옥처럼 바싹 마른 눈두덩을
너는 그림자로도 문지르지 않고
내 눈을 건너다봤다.
내 눈 역시
바싹 마른 지옥인 것처럼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두려웠다.)
두럽지 않았다.
피 흐르는 눈 / 한강 시인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이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중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출처]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 강 시집, 문학과지성사, 2024.10.20. 초판 5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