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 아름다운 시 모음 (누가 나를 위해/희망의 바깥은 없다/사랑하니까/너는 꽃이야/희망의 별/열쇠/12월의 편지/그림자/언젠가는/그 여자네 집/ 등)
마음이 글로, 글이 그림으로 그려지는
아름다운 언어의 마법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시 모음을 포스팅합니다
누가 나를 위해 / 이해인 수녀
누가 나를 위해
조용하고도 뜨겁게
기도를 하나보다
오래 메마르던
시의 샘에
오늘은 물이 고이는 걸 보면
누군가 나를 위해
먼 데서도 가까이
사랑의 기를 넣어주나 보다
힘들었던 일도 가벼워지고
힘들었던 사람에게도
먼저 미소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
내가 달라지는 걸
내다 느끼는 걸 보면
희망의 바깥은 없다 / 도종환 시인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사랑하니까 / 용혜원 시인
사랑이란
함께 걷는 것이다
멀리 달아나지 않고
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같이 걷는 것이다
서로의 높이를 같이하고
마음의 넓이를 같이하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까지
둘이 닮아가는 것이다
너는 꽃이야 / 윤보영 시인
꽃은 시들기 때문에
꽃이라고 한다는 얘기를 듣고
네가 꽃이라고 생각한 내가 미안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너는 꽃이야
예쁘잖아
늘 내 안에서
시들 새도 없이 다시 피는...
희망의 별 / 정연복 시인
어둠 속에
별은 빛나지
어둠이 내리고서야
별의 존재는 드러나지
어둠이 없으면
별의 반짝임도 없으리.
희망은
별 같은 것
삶의 어둠 속에서라야
희망의 별도 생겨나는 거지
슬픔과 불행을 모르면
기쁨과 행복 또한 모르리
열쇠 / 도종환 시인
세상의 문이 나를 향해 다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열어보면 닫혀 있는 문이 참 많다
방문과 대문만 그런 게 아니다
자주 만나면서도 외면하며 지나가는 얼굴들
소리 없이 내 이름 밀어내는 이데올로그들
편견으로 가득한 완고한 집들이 그러하다
등 뒤에다 야유와 멸시의 언어를
소금처럼 뿌리는 이도 있다
그들의 문을 열 만능열쇠가 내게는 없다
이 세상 많은 이들처럼 나도
그저 평범한 몇 개의 열쇠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드리는 일은 멈추진 않을 것이다
사는 동안 내내 열리지 않던 문이
나를 향해 열리는 날처럼 기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문이 천천히 열리는
그 작은 삐걱임과 빛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 소리
희망의 소리도 그와 같으리니
12월의 편지 / 혜원 전진옥 시인
한해를 걸어오면서
꽃이 피고 잎이 지기까지
꿈으로 너울진 시간들
언제나 설렘이었고
오늘이란 선물은
늘 새로운 희망이었다
하루하루 그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만으로도
삶의 이유가 되었으니까
이 소중했던 날들을
나는 노래하리라
모든 것이 감사했음을
그림자 / 함민복 시인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 만해 한용운
언젠가
말 못 할 때가 옵니다
따스한 말 많이 하세요
언젠가
듣지 못할 때가 옵니다
값진 사연, 값진 지식 많이 보시고
많이 들으세요
언젠가
웃지 못할 때가 옵니다
웃고 또 웃고 활짝 많이 웃으세요
언젠가
움직이지 못할 때가 옵니다
가고픈 곳 어디든지 가세요
언젠가
사람이 그리울 때가 옵니다
좋은 사람 많이 사귀고 만나세요
언젠가
감격하지 못할 때가 옵니다
마음을 숨기지 말고 마음껏 표현하고 사세요
언젠가
우리는 세상의 끝자락에 서게 될 것입니다
※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본명이 한정옥으로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나 1944년에 사망했다.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시인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거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한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 꽃 같던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던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하.면......
※ 김용택(1948.8.26~) 시인의 시는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시골감성이 가득한 따뜻한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특히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되 언어로 형상화한 시인으로 알려져있다. 시집으로는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 강 같은 세월, 그리운 꽃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