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 이해인 수녀의 아침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 수녀의 아침에 관한 주옥같은 시를 몇 편 포스팅합니다
새 해 새 아침 / 이해인 수녀
새해의 시작도
새 하루부터 시작됩니다
시작을 잘해야만
빛나게 될 삶을 위해
겸손히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아침이여
어서
희망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사철 내내 변치 않는
소나무빛 옷을 입고
기다리면서 기다리면서
우리를 키워온 희망
힘들어도 웃으라고
잊을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희망은 자꾸만 우리를 재축하네요
어서
기쁨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오늘은 배추밭에 앉아
차곡차곡 시간을 포개는 기쁨
흙냄새 가득한
싱싱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네요
땅에 충실해야 기쁨이 온다고
기쁨으로 만들 숨은 싹을 찾아서
잘 키워야만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조용조용 일러주네요
어서
사랑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언제나
하얀 소금밭에 엎드려
가끔은 울면서
불을 쪼이는 사랑
사랑에 대해
말만 무성했던 날들이 부끄러워
울고 싶은 우리에게
소금들이 통통 튀며 말하네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팽개쳐진 상처들을
하얀 붕대로 싸매주라고
새롭게 주어진 시간
만나는 사람들을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대하면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눈부신 소금꽃이 말을 하네요
시작을 잘해야만
빛나게 될 삶을 위해
설레이는 첫 감사로 문을 여는 아침
천년의 기다림이 비로소 시작되는
하늘빛 은총의 아침
서로가 복을 빌어주는 동안에도
이미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새해 새 아침이여
새해 아침에 / 이해인 수녀
창문을 열고
밤새 내린 흰 눈을 바라볼 때의
그 순결한 설레임으로
사랑아,
새해 아침에도
나는 제일 먼저
네가 보고 싶다
늘 함께 있으면서도
새로이 샘솟는 그리움으로
네가 보고 싶다.
새해에도 너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가장 정직한 시를 쓰고
가장 뜨거운 기도를 바치겠다
내가 어둠이어도
빛으로 오는 사랑아,
말은 필요 없어
내 손목을 잡고 가는 눈부신 사랑아,
겨울에도 돋아나는
내 가슴속 푸른 잔디 위에
노란 민들레 한 송이로
네가 앉아 웃고 있다
날마다 나의 깊은 잠을
꿈으로 깨우는 아름다운 사랑아,
세상에 너 없이는
희망도 없다
새해도 없다
내 영혼 나비처럼
네 안에서 접힐 때
나의 새해는 비로소
색동의 설빔을 차려입는다
내 묵은 날들의 슬픔도
새 연두저고리에
자줏빛 끝동을 단다.
아침 / 이해인 수녀
사랑하는 친구에게 처음 받은
시집의 첫 장을 열듯
오늘도 아침을 엽니다.
나에겐 오늘이 새날이듯
당신도 언제나 새사람이고
당신을 느끼는 내 마음도
언제나 새 마음입니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났던 날의
설레임으로
나의 하루는 눈을 뜨고
나는 당신을 향해
출렁이는 안타까운 강입니다
한여름 아침 / 이해인 수녀
비 온 뒤의 햇살에 간밤의 눅눅한 꿈을
젖은 어둠을 말린다
바람에 실려오는 치자꽃 향기
오늘도 내가 꽃처럼 자신을 얻어서
향기로운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열매를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는
꽃의 겸손 앞에 내가 새삼 부끄러워
창가에 선 한여름 아침
다시 겨울 아침에 / 이해인 수녀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깃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좋은 아침 / 이해인 수녀
힘들 때일수록 기다려지는
봄날 같은 사람
멀리 살면서도
조용히 다가와 분위기를 따스하게 만드는 사람
소리를 내어도
어찌나 정겹게 들리는지
자꾸만
가까이 있고 싶은 사람
솔솔 부는 봄바람 같이
자꾸만
분위기를 띄워 주는 사람
햇살이 쬐이는 담 밑에서
싱그럽게 돋아나는
민들레 같은 사람
지천을 노란색으로 뒤덮은
개나리같이
내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사람
조용한 산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처럼
꼬옥 보고 싶은 사람
어두운 달밤에도
기죽지 않고
꿋꿋이 자기를 보듬는
목련 같은 사람
봄소식 들을 무수히
전해주는 봄 들녘처럼
넉넉함을 주는
싱그러운 사람
너무나 따스하기에
너무나 정겹기에
너무나 든든하기에
언제나 힘이 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봄날 같은 당신입니다
아침의 향기 / 이해인 수녀
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고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유하게 녹아서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평화의 노래이기를
비 오는 알 아침 / 이해인 수녀
밤새 길을 찾는 꿈을 꾸다가
빗소리에 잠이 깨었네
물 길 사이로 트이는 아침
어디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나를 부르네
만남보다 이별을 먼저 배워
나보다 더 자유로운 새는
작은 욕심을 줄이라고
정든 땅을 떠나 힘차게
날아오르라고
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네
아침을 가르는 하얀 빗줄기도
내 가슴에 빗금을 그으며 전하는 말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떨어져 내리는 아픔을
끝까지 견뎌 내는 겸손이라고
오늘은 나도 이야기하려네
함께 사는 삶이란 힘들어도
서로의 다름을 견디면서
서로를 적셔주는 기쁨이라고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 이해인 수녀
첫눈, 첫사랑, 첫걸음
첫약속, 첫여행, 첫무대
처음의 것은
늘 신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순결한 설레임의 기쁨이
숨어있습니다.
새해 첫날
첫 기도가 아름답듯이
우리의 모든 아침은
초인종을 누르며
새로이 찾아오는 고운 첫 손님
학교를 향하는 아이들의
나팔꽃 같은 얼굴에도
사랑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현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기침소리에도
가족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하는
어머니의 겸허한 이마에도
아침은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세 아침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밤새 괴로움의 눈물 흘렸던
기다림의 그 시간들도
축복해 주십시오. 주님,
듣는 것은 씨뿌리는 것
실천하는 것은 열매 맺는 것이라는
성 아오스딩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서
걷돌기만 했던 좋은 말들
이제는 삶 속에 뿌리내리고 열매맺는
은총의 한해가 되게 하십시오
사랑과 용서와 기도의 일을
조금씩 미루는 동안
세월은 저만치 비켜가고
어느새 죽음이 성큼 다가옴을
항상 기억하게 하십시오
게으름과 타성의 늪에 빠질 때마다
한없이 뜨겁고 순순했던
우리의 첫 열정을 새롭히며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는 일
정을 나누는 일에도
정성이 부족하여
외로움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
가까운 가족끼리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우리
잘못해서 부끄러운 일 많더라고
어둠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밝은 태양 속에 바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길 위에 푸른 신호등처럼
희망이 우리를 손짓하고
성당의 종소리처럼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새해아침
아침의 사람으로 먼길을 가야할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이해인(1945.06.07~) 수녀 소개
가톨릭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녀이지 시인으로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1964년 수녀원에 입회했다. 1968년 첫 서원을, 1976년 종신서원을 했다. 필리핀 세인트루이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 시인으로 등단하여 많은 시와 수필을 써온 문인으로 제9회 새싹문학상, 제2회 여성동아대상, 제6회 부산여성문학상, 제5회 천상병 시문학상, 제26회 한국가톨릭문학상 본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