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 가을 시 모음
가을 정취를 만끽하면서 가을에 관한 시를 포스팅합니다.
가을 아침에 / 김소월
어둑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회색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섭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 말락 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쌓여오는 모든 기억은
피 흘린 상처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갓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靈)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속이 가비엽든 날
그리운 그 한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이 가는구나 / 김용택 시인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 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빛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 산에 기댄
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가을 그리움 / 배혜영 시인
무슨 색깔이면 어떠랴
사랑하는 사람 고운 색이
가을인 것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가을계곡의 물길 따라
오색 색상으로 번져가는
웃음의 향기 같은 변화
바람도 멈춰 서서
고운 색 이름을 생각해 내고
푸른 창공을 흘러가는
나그네 같은 구름도
그 고운 색 이름을 몰라
잠시 멈춰 생각에 잠기는
수수하기만 한 욕심
가을남자의 사랑 같은 색
갈대의 꽃잎들이
그리움에 잠겨 흔들릴 때
추억의 바람을 안겨주며
가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갈색의 그리움이여
떠나는 가을 / 배혜영 시인
그렇게도 다정하게 미소 짓던
붉은 웃음의 단풍도
이 가을만은 나를 모른 채
계절을 떠나며 멀어지고
국화꽃 향기 사라지는 길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겨우 겨우 마음 돌려
지금 내게 세워두었는데
세월을 휘발유처럼 태우며
지나가는 내 삶의 자동차는
오늘도 빠르기만 하구나
지나간 자리
불타 없어진 추억의 자리
늦어도 올 것만 같았던
그곳에서 날마다 기다리는
내 끝없는 그리움은
아쉬움으로 떠나는 시간에
손 흔들어 이별을 한다.
보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갖고 싶어도 아껴야 하는
떠나는 시간 속에서
그래도 미워할 수 없이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할
너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은
10월의 찬란한 빛이 된다.
단풍의 이유 / 이원규 시인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잎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은행나무 / 스텔라윤 시인
길가에 초록빛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샛노란 잎사귀와 짜릿한 냄새로 존재감을 풍기는 너.
아, 맞다. 너 은행나무였구나.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은행나무가 아닌 적이 없지만
여름 내내 너를 은행나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흔한 초록색 가로수였을 뿐.
은행나무에는 은행나무만의 계절이 있다.
애쓰지 않아도 은행나무는 은행나무가 된다.
아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은행나무가 아닌 적이 없다
사람들이 몰랐을 뿐
살아있다면,
나이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은행나무는 은행나무가 되고
나는 내가 된다.
코스모스 들녘에서 / 은파 오애숙
들판의 물결
황금빛 너울 쓰고
내게 다가오는 이가을
뭉게구름사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하늘 시린 푸름의 날개
길섶에 코스모스
하양 분홍 옷 입고
하늘하늘 춤을 출 때
문득 어린 시절
단발머리 소녀가
갈바람 속에 걸어온다
서산 해거름 속
붉은 노을빛 그리움
가슴에 한아름 안고서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 수녀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는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11월 / 나희덕 시인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가을 편지 / 손병흥 시인
단풍 곱게 물들고
갈색빛 예쁘게 물들어진
이 가을 길 몽실 걸으며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홀로 울긋불긋 물든 사연을
가슴에 가득 담아두고서
서걱이는 억새풀 뭉게구름 한 자락
오래오래 안고서 사랑 담긴 편질 쓰다
내 영혼 그대 사랑으로 채워도
이렇게 내 가슴 통해 황홀하고
아름답도록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오늘밤 꿈속 아슴아슴 행복 담아
그리움 되어 밀려오는 파도 따라
갈피마다 꽂혀버린 마음으로
오래도록 못다 한 사연 기다림 통해
가을 향길 풍기는 사랑이 되고픈 별꽃
가을이 와 / 나태주 시인
가을이 와 나뭇잎이 떨어지면
나무 아래 나는
낙엽 부자
가을이 와 먹구름 몰리면
하늘 아래 나는
구름 부자
가을이 와 찬바람이 불어오면
빈 들판에 나는
바람 부자
부러울 것 없네
가진 것 없어도
가난할 것 없네
가을엽서 / 안도현 시인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나뭇잎 러브레터 / 이해인 수녀
당신이 내게 주신
나뭇잎 한 장이
나의 가을을
사랑으로 물들입니다
나뭇잎에 들어 있는
바람과 햇빛과
별빛과 달빛의 이야기를
풀어서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한 장의 나뭇잎은
또 다른 당신과
나의 모습이지요?
이 가을엔 나도
나뭇잎 한 장으로
많은 벗들에게
고마움의 러브레터를
쓰겠습니다.
코스모스 / 윤동주
청초(淸楚)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少女)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庭園)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윤동주 시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 나희덕 시인
문득 누군가가 그리울 때
아니면
혼자서 하염없이 길 위를 걸을 때
아무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단풍잎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
가을에는 정말
스쳐가는 사람도 기다리고 싶어라
가까이 있어도 아득하기만 한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미워하던 것들도 그리워지는
가을에 모든 것이 다 사랑하고 싶어라
가을 하늘 / 최만조 시인
연못에 가을 하늘이
파랗게 빠져 있다.
두 손으로 건져내려고
살며시 떠올리면
미꾸라지 빠지듯
조르르 손가락 새로
쏟아지는 가을 하늘
가을 하늘 / 목필균 시인
누구의 시린 눈물이 넘쳐
저리도 시퍼렇게 물들였을까
끝없이 펼쳐진 바다엔
작은 섬 하나 떠 있지 않고
제 몸 부서뜨리며 울어대는 파도도 없다
바람도 잔물결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고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 끝에 머물며
제 몸만 흔들고 있다